2008년 6월 23일 월요일

김선생일기

김선생일기
-죽음을 받아들이기
잠에서 깨기 직전, 잠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었다. 이럴 때면 현실과 꿈이 헷갈린다.
아침식사는 학교로 가는 길에 커피와 도넛으로 해결한다. 맛이 있다거나 건강에 좋기 때문이 아니라, 먹기 편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아침을 많이 먹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밥을 많이 먹었는데, 1년 뒤 시들해졌다. 지금은 밥을 준비하고 먹는 데 들었던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있다.
오전 수업을 하고 배가 고파질 때쯤이면 점심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잠시 나는 재미있는 선생이 되기로 하고 학생들에게 점심으로 뭘 먹으면 좋을지를 묻는다. 종현이가 삼겹살, 이라고 하자 모두가 웃는다. 이들이 웃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아직 무절제하다. 종현이가 고개를 파묻고 웃음은 한동안 그칠 줄 모른다.
고기를 먹을 때마다, 이제는 거의 신경쓰지 않는, 희미해져 흔적만 남은 죄책감이 느껴진다. 채식을 옹호하는 소설이 있었다. 정확히는 너의 몸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소설이었다. 이 질문은 무엇을 먹어야 윤리를 지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윤리가 왜 인간에게 필요하며 어떻게 소용되느냐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나는 질문을 묻으며 다음 살점을 집어먹는다.
범주는 편리하다. 하나의 기준으로 대상 집단을 두 범주로 나누는 일은 작업 해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경우는 복잡한 범주화를 요구한다. 분명한 의견을 가진 자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정말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그의 생애에서 극적으로, 또는 미세하게 의견을 바꾼 일은 없는가? 그는 의견을 바꾸기 이전에 그의 의견에 대해 얼마나 자신있었으며, 의견의 변화는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크게는 어떤 사상으로 작게는 설문조사의 문항들로 사람들을 말하며 통계의 정확함은 상당한 신뢰를 받고 있지만, 모든 진지한 개인에게 발언이라는 행위는 특정한 방식으로 의미를 갖는다.
발언이라는 행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 발언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그 상황은 "너의 의견이 그렇다면 더 적극적으로 펼쳐봐"라든가 "당신의 지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같은 주변의 보이지 않는, 혹은 직접적인 요구가 문제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진짜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내 발언은 나에게 무엇인가? 발언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괜찮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발언자, 많은 경우 행동하는 이들이 분명하다고 여기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대처가 명백한 반대를 만나는 일이 있다. 신념에 찬 발언자는 생각한다. '저들은 진지하지 않아. 대체 한 번쯤 고민해보기라도 한 걸까? 그들의 삶에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대체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가?' 진지함과 그렇지 않음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 문제에 대한 논쟁에 참여할 자격은 누가 정하는가? 이 문제에서 자격이라는 개념은 유효한가? 유효하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특정 문제에 대해서인가 아니면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무효인가?
호기심과 반성은 인간다움의 증거 가운데 하나다. 반성을 이루는 부품인 개념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데는 자기 일관성을 지키려는 자존심도 한몫 한다. 반성에 대한 반성은 마지막 단계에 가깝다. 내가 이런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에 의미가 있고 없고가 무의미하다. 일로 돌아가자. 점심 식사를 끝내고 오후 수업에 들어간다. 어느 영화 속 인물은 말했다. "입으로 벌어먹고 사는 데 한 번 익숙해지면 다른 일 못해." 그 말이 맞다. 피곤하고 쉬운 일이다.
오늘 날씨 진짜 좋지? 최은지가 묻는다. 최은지는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직업 외의 개인적인 일에 쓸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힘이 항상 남아있는 여자 수학선생이다. 그가 내게 말했다. 우리 김선생은 참 착한 것 같아. 매사에 긍정적이고.
한 사람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긍정적, 부정적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매우 무성의하게 평가할 때 쓰는 말이다. 여기 보다 복잡한 범주화 작업을 요구하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오늘 남은 수업도 하나 더 있다. 최선생은 대체로 내게 살갑다. 날씨가 맑고 지금 계절은 봄이다.
덧붙이자면 긍정적이라는 말이 성의없는 표현임에도, 그 말을 한 사람이 그녀라는 사실은 내게 많은 의미가 있으며 그녀에게도 그렇다. 그 말을 소리내어 입으로 말할 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으며 예전에 단지 몇 번 보았을 뿐인 미소와 감정을 읽는다. 내 미래가 희망적이라면 앞으로 오랫동안 그녀의 그 웃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웃음은 나를 향한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만 보이는 웃음이기 때문에, 그 웃음이 그녀만의 것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나는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서 매우 비슷하거나 같은 웃음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개인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긴 역사를 다시 쌓을 생각을 하면 나는 지친다. 새로움은 자극이 아니라 부담이다.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토하던 날 밤, 최은지는 고기를 집어먹여주던 손으로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변기를 붙잡고 토하면서 나는 관계 속에 정상적으로 안착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 학교에서 내가 속한 집단 내에서 내 위치는 굳이 위아래를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굳건했고, 그렇게 나는 고민거리를 묻었다. 그 무렵 내가 스스로에게 매일같이 댄 핑계는, '나는 선후배, 또는 선후임 문화의 바깥에 서 있다'였다. 소속은 피할 수 없었지만 대립은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유령이었고 다시는 토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엉망으로 망친 첫 연애 이후로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굴기 위해 애썼고, 노력은 빛을 보았다.
어떤 작가는 썼다. 그 화자는 미래가 과거처럼 분명하여 미래를 회상하며, 과거를 떠올리려 노력하지만 갈수록 알 수 없어진다고 했다. 모든 것에 대한 고민을 끝낸다면 모든 미래를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내 수업은 기억하고 있고, 가끔 가다 최선생의 수업을 매우 잘 기억하는 척 함으로써 호감을 얻을 줄도 알고 있으며,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도 알고 있다. 이것으로 오늘 나의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소설은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사건은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사건이다.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유의미한 요소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를 모두 추측해낸다는 것이고, 믿음이 확신을 넘어서면 사건은 사건이 아니게 된다. 최은지가 내 등을 두드려주던 그날 나는 잠들면서 최선생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꿈을 꾸었다. 지금 우리는 고기를 먹으러 간다.
매일 아침 나는 <세계의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을 본다. 주된 레파토리는 먹을거리 탐방인데, 맛있는 음식과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는 일은 꽤 즐겁다. 최선생과 함께 앉아 문제학생에 대해 수다를 떨다가 고기가 참 맛있다는, 진부하면서도 신선한 대화를 나누며 쌈을 싸먹는 일도 즐겁다. 고민은 스쳐갈 뿐 수면 위로 떠올라 붙잡지 않는다. 대화와 함께하는 삼겹살이 참 맛있다. 더 젊었던 어느 시절에 나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난 언젠가 채식을 시작할 거야. 지금은 그저 고기가 맛있다.
우리는 자동차가 없다. 걸어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누구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부덕을 탓하지도 않고 서로가 그 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사실을 서로가 알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기 때문에 웃는다. 술 마시고 구토하던 날로부터 한 해 뒤 우리는 정확히 이런 색깔의 밤에 헤어져 잡았던 손을 놓고 집으로 향했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의무를 더 지우지 않는다. 직업과 타이틀이 의무다.
한 개인은 특별한가 평범한가? 모든 특징의 조합이 유일하다는 의미에서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특별함의 기준을 정하는 평가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대답은 달라진다. 한 개인이 그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그를 평가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겸손함의 미덕보다 더 복잡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이 문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모든 관계가 특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 개인이 실은 모든 논쟁적이라고 여겨지는 분야에 깊은 관심이 있고 적지 않은 지식과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다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당신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이 평범한 척 하려 애쓰는 개인에게 무슨 말을 건넬 것인가?
당연하게도 나는 아무에게도 이런 종류의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나의 생각을 정리할 한 문장을 준비할 수 없었으며, (맙소사, 그런 문장은 나의 고민을 고작 하나의 문장으로 격하해버리고 결국에는 아무 것도 표현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설명은 많은 단어들을 필요로 했고, 길어지는 설명은 나를 마치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는 게으름뱅이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원칙을 만들었다. 같은 고민을 하지 않는 누구에게도 고민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평범해지려 애써왔고 노하우를 배웠다. 누군가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결론에 닿지 않은 이상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창작과 감상, 비평은 내게 하나의 출구로 보였는데, 예술이나 철학 그 어느 것도 일찍 접할 환경이 되지 않았고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을 동력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집중력이나 천재성은 내게 없었다. 이제 내 꼴은 나무에 매달린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가 되었다.
무한히 큰 도서관에서 모든 책과 모든 글을 읽고 무한한 시간 속에서 그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 꿈을 꾸었다. 그 소설 속 독학자 역시 같은 꿈을 꾸었을 지 모른다. 어느 추운 저녁, 나는 최은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7번, 나는 이 도시에서 10년이 넘도록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있다. 이따금 나는 몽상에 빠지곤 했다. 버스의 운행이 길어져서 영원에 도달한다면 어떨까. 혹은 버스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버스를 기다릴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면 몇 권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 몽상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몇 권의 책과 몇 마디의 대화, 몇 마디의 사람으로 나는 만족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따금 나는 그것을 희망을 버렸다고 간단히 표현했다. 한 마디의 발언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이따금 그런 식의 평가를 주변 사람들에게 하곤 했는데, 희망을 보는 관점을 피력했을 때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나를 썩 기분 좋게 만들지는 않았다. 내가 애초에 희망에 관한 발언에 어떤 의미를 확정적으로 부여했던가?
나란히 서서 길을 걷는다. 쇼윈도의 텔레비전은 지금은 사망한, 자수성가하고 전설을 만든 대기업 회장의 연설을 바탕으로 만든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참 대단한 것 같아.
왜? 나는 짧게 되물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엄청난 것으로 여겨지는 업적을 무일푼에서 일궈냈잖아.
그래, 대단하지. 너도 그렇게 되고 싶어?
응.
나는 그녀가 얼마나 많이 노력하는지 안다. 대학교 때는 동아리 회장을 맡아 각종 모임과 행사를 주도하기도 했고, 성적이 최상위권에 들 정도로 뛰어나진 않았으나 대단히 노력했으며, 편부모 가정의 자녀로서 늘 형제자매에게 힘이 되고 좋은 가족의 일원이 되려 노력했다. 또한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그 짧은 대답은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평범한 것도 나쁘지 않아. 우리 모두가 그처럼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나? 무언가 특별한 일을 당장 시작해야 하나? 그렇게 해오지 않은 게 잘못은 아냐. 우린 단지 덜 타고났거나 환경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이지. 흥미로워하거나 부러워할 수는 있어도 질투를 느끼거나 지금 내가 잘못된 곳에 있다고 느낄 필요는 없어.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고민할 필요는 있지만, 왜 내가 그와 같지 않은지 고민할 필요는 없어. 하고 말하는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참 대단한 사람이야.
집으로 돌아와 나는 오래된 편지들을 꺼낸다. 20통 남짓한 편지가 있다. 최초로 주고받은 것은 내가 훈련소에 있을 때 일이고, 그 때와 지금의 사이에 몇 개의 기념일이 있었다. 10통째 편지를 주고받을 때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전혀 특별하지 않게 시내로 나가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본 다음 길을 걷다가, 꽃을 한 다발 사들고 한 무릎을 꿇고 사랑해, 라고 전혀 특별할 것 없이 말한다. 그 뒤로 또 몇 개의 기념일이 지났다. 손을 잡고 비 오는 길을 걷는다. 내일이 되면 오늘은 다시 지나간 기념일 중의 하나가 된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또 그 사실이 의미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가끔은 평범함으로 가득찬 늪에서 작은 특별함을 찾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잠깐 동안 세상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물론 꿈은 길지 않다. 반복되는 특별함은 곧 진부함이다. 세상에서 특별함이라는 이름의 종이 멸종했다고 뉴스에 나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아침이다. 나는 수업을 하러 들어간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전화를 받고, 믿을 수 없는 소식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한 명의 학생이 결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종현이가 자살했다.
자살이 아니라 폭행으로 인한 입원이었다면 오늘이 덜 특별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죽음은 무엇을 다르게 만드는가. 어느 부처는, 사람 안 죽은 집 없다며 중생을 달랬다. 나도 그렇게 학부모를 달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할 지는 정해져 있다. 나는 일이 하나 늘었음을 느꼈다. 죽음의 무게는 이렇게 말로 격하된다. 죽음에 적합한 예우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 되려 그 무게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니 아이러니다.
일은 하나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일이 다 끝난 후 나는 만성적인 피곤함을 느꼈다. 종현이의 자리에 며칠간 놓여있던 꽃을 치우고, 그 책걸상은 학생이 더 늘어난 옆반으로 옮겨간다. 이 학생들은 죽음의 무게를 어떻게 다뤄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평소처럼 말하고 떠드는 방법으로 죽음에 대처한다. 더 큰 어른들은 정해진 예식으로 대처한다. 나는 생각한다. 종현이의 가족보다 종현이의 죽음을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종현이 본인이다. 죽음을 결정한 이상 누구도 그 의미를 나눠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몇 명의 학생이 전학을 갔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방학은 학교에 어떤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작년에 사용한 입학식 장소 안내 사인을 올해도 사용한다. 그런 물건을 어디에 보관하고 열쇠는 어디 있는지, 새로 온 선생에게 최선생이 말해주고 있다. 새로운 사람을 대하는 목소리에 그렇게 의욕이 담기다니, 보는 나로서는 참 신기하고 부러우면서 뿌듯하다. 나는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과 보통 이상의 관계에 있다. 오늘은 참 특별한 날이라고 외치는 듯한 봄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온다. 학교는 사회가 그렇듯 평범함의 늪이다. 때로 어떤 평범함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특별함의 반복으로 만들어진다. 내 앞날을 기다리는 평범한 길이 그와 같은 특별함으로 가득찼으면 좋겠다. 그 길에 나는 어떤 사람이 함께하기를 기대한다.
신입생들을 일찍 돌려보낸다. 최은지가 갑자기 한 어린아이의 사진을 보여준다.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의 어린이라고 한다. 한 달에 3만 원, 그녀는 후원을 한다. 그녀는 참 착하다. 사치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돈을 잘 쓴다고 할 수 있는 그녀는 이렇게 착한 일도 한다. 나는 새삼 그녀가 부럽다. 올해 처음으로 보는 봄 날씨다운 날씨가 그녀를 그렇게 결심하게 했다고 한다. 여기, 매우 특별한 봄을 누리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다시 한 번, 나는 그녀가 부럽다.
아이들 이름을 거의 외울 때쯤 종현이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무슨 날이라고 했는데, 솔직히 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예식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흘려들었다. 자식 보는 낙에 살았는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취미라도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고 조금은 부주의하게 말했다. 취미에 빠지진 마시구요, 허전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날 저녁 나는 종현이 아버지와 식사를 함께했다.
종현이 아버지는 종현이보다 스무 살이 많았고, 종현이 어머니와는 이혼하였으며, 요리를 취미로 하고 있었다. 삼겹살집 텔레비전은 외국산 소 수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뉴스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연인끼리 고기를 먹으러 온 사람도 있었고 휴가를 나온 군인도 있었는데, 종현이 아버지가 술잔을 들었다.
그날 밤 종현이 아버지는 토했고, 나는 그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하루의 끝이었고 일주일의 마무리였다.
가끔은 정말 특별한 일도 일어난다. 다음날 이른 아침 우리는 우리가 졸업했던 학교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학교는 예전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함께 했던 동아리가 당시의 동방에서 작은 모임을 갖기로 했다. 곧 우리는 익숙한 얼굴들을 만났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는 우리 둘 뿐이었는데, 짖궂은 질문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실 그것 때문에 내내 불안했는데, 다행히도 이들은 내가 맡는 학생들처럼 미숙하지 않다. 나는 안도하면서 무방비하게 웃는다.
한 개 기수가 모였는데 동아리가 그리 크지 않은 터라 일곱 명이 전부였다. 곧 우리는 학생 시절과 다를 것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내 나는 화제가 떨어져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나는 이런 자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누군가를 위해서 나가곤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날 저녁 계속된 그 자리에서 나는 내가 기막힌 우연에 우연 이외의 다른 미신적인 이유를 붙이지 않을 만큼 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뻔 했다. 그 자리에 모인 친구 중에는 나보다 한 살이 어린 종현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일찍 술에 취한 그는 내게 물었다. 형, 죽으면 어떤 느낌일 거 같아요?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편안한 느낌도 없고 그냥 느낌이란게 다 사라지지. 당연하잖냐. 데스노트 마지막 화 안봤어? 최은지는 나와 종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외국인을 보는 눈빛 같았다.
다음날 오전 나는 어제 모임에 모였던 친구 중 한 명으로부터 종현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음 수업에 들어가면서 나는 우스운 사실을 떠올렸다. 학창 시절에 종현이에게 2만 원을 빌려줬던 것이 생각났는데, 그 돈을 분명히 받지 않았다. 딱히 그 뒤로 내가 돈이 급한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나는 종현이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나 말고 그 누구에게 관심이 있던가? 대학 1학년 때 사귀었던 선배가 좋았던 것은 그녀가 나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했던 선배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최소한 나와 관련있는 사람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가 평가하는 최은지는 나에게만 의미있을 뿐, 그것이 그녀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가지는 의미는 없다. 내 평가가 그녀에게 의미있다면 그것이 그녀 '자신'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우연은 계속되어, 나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로 끝난 종현이의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종현이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울 수 있는 한 마디를 해달라는 예의바르고 슬픈 부탁이었는데, 왜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니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아마도 내 기억 속에서 나는 두 번 정도 술에 잔뜩 취한 종현이를 집에 바래다 주었다. 매번 종현이의 아버지가 늦은 시간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아들을 기다렸던 것까지 생생히 기억났는데, 수년간 단 한 번도 회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기억해냈다는 점이다. 그때 나는 고페 치를 시험이나 제출해야 하는 레포트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고, 진심으로 종현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라는 말을 해야 하나? 지금의 나는 인간 사이의 '정'을 사회를 유지하고 가족을 지탱하는 데 유용한 개념으로 파악한다. 보통 사람들은 정, 또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건 차가워지고 무심해지려는 내 노력의 일환이다. 물론 내가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 않게 보이려 애쓰기 때문이다.
한 줌의 인간성을 내가 가지고 있다 해도 굳이 그것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한 줌의 도덕은 더 복잡한 문제다. 때로 나는 도덕, 양심 때문에 괴롭거나 분노한다. 남의 파렴치한 행동을 무심하게 넘기고, 도덕을 버리고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상황에서 거리낌이 없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나는 내심 부러워할 지도 모른다.
두 개의 죽음은 내가 처음 죽음을 보았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함께 살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이었는데, 노화로 인한 자연사였다. 매일같이 밥을 같이 먹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초등학생 때의 내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확실치 않다. 심지어 나는 지금도 그 죽음이 내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난방을 위해 연탄불을 갈던 할머니는 그 후 연탄불을 보일러로 바꾸면서, 한동안 밥을 내가 대신 하게 되면서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기억에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왜 죽은 사람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는가? '더 인간답게, 함께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당시의 내게 너무 형편없이 들렸다. 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동의하지 않을 뿐 반대 의견이나 대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어려운 문제다.
그날 저녁 나는 종현이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종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가 가는 도중에 끊어졌다. 전화를 일부러 끊은 거라면 지금 감정은 절망보다는 부끄러움이 크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굳이 두 번 걸지는 않았다. 그날따라 나는 몹시 피곤함을 느꼈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일어나 학교에 갔고, 매우 오랫동안 같은 학교에 간 뒤 학교는 없어졌다. 나는 죽지 않는 꿈을 꾸었다. 계속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고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나는 모든 사람을 만나려 했고, 인간의 모든 창작물을 접하려 하고 있었다. 모든 노래를 불렀고 모든 소설을 읽었으며, 모든 회화를 보았다. 고민은 계속되었다. 왜 우리는 다른 의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최선의 해결책은 타인에 대한 존중 뿐인가. 계속되는 여행의 어느 날 나는 한 명의 작가와 한 명의 오페라 가수와 함께 식사를 같이하게 됐다. 나는 빵에 휘핑 크림을 발라 먹었고, 작가는 거위 간으로 만든 요리를 주문했으며, 오페라 가수는 송아지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했지만 이곳에서는 취급하지 않아서 다른 것으로 메뉴를 바꿔야만 했다. 테라스 밖으로 내가 본 익숙한 황혼 중의 하나가 지나갔으며, 작가가 입을 열었다. 자기는 요즘 외국의 비주류 문학을 파헤치는 데 재미가 들렸다면서 어떤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언젠가 읽었던 소설이었고 그녀는 이것에 대해 나중에 더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나를 부러워하지 않았고 단지 나를 만난 것을 기뻐할 뿐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체계를 세우려는 욕구는 박람강기를 바탕으로 요구하는데, 누구나 가지는 욕구는 아니다. 나의 수집욕은 언제나 체계를 세우려는 욕구로 발전하기에 부족하다고 느낀다. 호밀 빵을 모두 먹고 난 뒤 쇠고기 수프를 주문하며, 작가가 말한 소설에 대해 떠올린다.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쓴 소설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그 소설은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묘사이자 조롱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소설 또한 매우 불완전할 수밖에 없구요. 주인공은 이루어질 수 없는 걸 원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조롱하고 타인마저 그 조롱의 대상으로 삼죠. 아직 전 그 소설을 다 읽지 못했는데, 결국 주인공은 여행의 끝에서 어떻게 되죠? 나는 대답했다. 글쎄요,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댓글 1개:

  1. 조금 다듬어야 할까. 네 글을 읽고 있으면 슬퍼진다. 닮아서일까 체온의 그리움이 묻어나서일까. 뭔가 내놓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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