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31일 화요일

<골드미스가 간다>

상투성이 악한 것은 아니다. 삶에서 결혼은 아주 중요한 의례인데, 사실 삶의 질을 위해 상대를 고르는 행위가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시대적인 발전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주체의 의사가 어느 정도는 반영되는 게 요즘이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경제의 논리가 작동하여, 우수한 상대는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갑남을녀는 대개 제 무리 속에서 짝을 찾고, 갑을 관계에서 갑은 갑끼리 을은 을끼리 어울리는 게 통념이지만, 많은 경우 20개 직종에 속하는 남성이 선택의 자유를 더 누리는 게 현실이다.

보편적인 소망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게 무어가 잘못이란 말인가? 심지어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감동을 읽기도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단지 잘못은 그보다 훨씬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질러졌을 뿐이다.

어쨌든 나는 이 쇼를 즐겨 본다. 아이스크림 가짓수보다도 적은 직종이 아쉽지만, 그 쉽고 달콤한 소망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비록 낭만은 잃은 지 오래지만, 낭만을 지탱하는 금전의 기둥은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

직업

하고 싶은 일을 생업삼는 건 어려운 일이다. 소위 '먹고 살기' 위해선 일을 가리기가 힘든 것이 요즘인데, 다른 일을 하면서 하고픈 일에 대한 꿈을 키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미디어는 꿈을 이룬 이들을 찍어 보도하고 미화한다. 대개 그들은 꿈과 돈을 모두 쟁취한 이들이다. 사실 금전이 없는 꿈은 꿈이기 힘들기도 하다.

꿈은 반드시 있어야 할까? 사실 꿈이 있을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그저 일신의 안위만 추구하기에도 바쁜 삶이 대부분이다.

이미 행복에 대한 관념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사회에서 직업과 꿈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감수성일 수도 있다. 이런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불러올 수 있는 변화가 도대체 말이 되기나 한다는 말인가? 단지 직업을 장식한 포장을 보여주는 것만이 의미있는 일의 전부일지 모른다. 정말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에 대해 한번쯤은 고민해보아야 할 일이다.

2009년 3월 21일 토요일

사교의 미덕

시대를 막론하고 사교는 권장되는 미덕이었지만, 요즘의 사교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순수한 호기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교는 사라지고, 일신의 영달과 금전적 도움을 위한 사교가 중요시되며 진실한 것이라고 믿는 시대다. 부조하지 않은 자 돌을 던져라.

부조가 창피한 일이라거나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관계가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는 중요한 증거라는 점에서 부조를 말한 것 뿐이다. 낯 부끄러움 없이 액수를 공공연히 말하는 이가 당당하게 굴 수 있는 현실 이전에, 액수를 고민해야 하는 일 자체가 이미 부끄러움이다. 이 부끄러움마저 잊었다면 그야말로 진정 개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