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5일 토요일

카프리

인간은 시각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데, 시각만으로 식욕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같은 이야기를 성욕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된 음화부터 거의 비밀스럽기까지 한 온갖 성적인 상징들을 고려해보면 특히나 현대에 성적인 시각적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불가능하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자극을 재생산하는 매체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매스미디어 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근 십여년 전 한 심야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나를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의 성추행 정도'를 측정하는 안경이 등장한 적이 있다. '그녀가 옷차림으로 나를 유혹했기 때문에 나는 무죄다'라는 변호를 둘러싼 이야기도 떠올릴 수 있다.

자극의 재생산에 앞서 적절한 교육이 있어야만 올바른 인식과 사용이 있을 수 있는데, 교육은 고사하고 소통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성에 대해서는 남성과 여성이 완전히 다른 관념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한국의 성범죄 통계에 대해서는 다들 다른 수치를 인용하는 통에 무엇이 올바른지는 모르겠으나, 들려오는 경험담들에 의하면 성추행은 매우 흔한 일이라고 한다. 이런 부정확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인용하는 건 거의 무의미한 일임에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이유를 짐작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아 보인다.

이처럼 거의 모든 문제가 교육으로 깊이 연결되는데도 불구하고 문제를 시정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교육 그 자체의 속성에도 그 원인이 있다. 교육 체제에 오랫동안 문제가 있어왔다는 담화가 있다면, 그 문제의 인식 주체는 해당 교육 체제의 수혜를 받은 이임이 분명한데, 이처럼 복잡한 문제의 해소에 있어 피해자 대다수가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라면, 체제의 전복은 커녕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 된다. 즉 현존하는 문제가 문제라는 것은 어렴풋이 인식하지만, 정확한 현상 파악은 극히 일부만이 할 뿐이며, 문제에 대한 담론은 그렇게 자격이 결여된 지성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오가기만 하고 진전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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